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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20년간 700여 고독사망자 수습···치열함 대신 인간적인 일 선택했죠"

국내 첫 코로나19 사망자 수습 나선 강봉희 장례지도사협의회 단장

강봉희 단장이 16일 대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봉사단 생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 제공=(사)장례지도사협의회봉사단


“봉사는 저를 위해 하는 일입니다. 봉사 활동을 하면서 더욱 행복을 느낍니다.”

지난해 2월 대구에서 코로나19 사망자가 처음으로 발생했다. 결국 대구시는 고독사 노인과 기초생활수급자의 시신을 수습하며 봉사 활동을 벌이던 강봉희 (사)장례지도사협의회봉사단 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구시 공무원이 봉사단 사무실로 찾아오겠다는 전화였다. 강 단장은 궁금해 곧바로 대구시청을 찾아 담당 공무원을 찾았다. 돌아온 대답은 코로나19 사망자의 시신을 아무도 수습하지 않으려 하니 수습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지난 20년간 대구시에서 장례지도사로서 자원봉사 활동을 벌여 시신 수습에는 주저함이 없었지만 코로나19 환자 수습은 그로서도 당혹스러웠다.

강 단장은 “지인 의사들이 걱정하면서도 숙주가 죽으면 바이러스가 죽는 만큼 바이러스가 사망자가 살아 있을 때처럼 활동하지 못할 것이라고 조언했다”면서 “결국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겠다는데 이것도 봉사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나섰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강 단장은 지난해 코로나19 사망자가 가장 먼저 발생한 대구에서 감염자 시신을 처음으로 수습한 사람이다.

물론 코로나19 사망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병원에서 사망하신 분은 병원 측이 시신을 비닐 팩에 밀봉하고 의료용 시신 팩에 다시 감싸야 한다”며 “하지만 병원이 고인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아 봉사단이 밀봉 과정부터 챙겨야 했다”고 전했다.

강 단장은 지난해 2월 28일부터 5월 16일까지 스물네 명의 코로나19 사망자를 수습한 뒤 더 이상 이들을 수습하지 않는다. 첫 사망자 발생 이후 강 단장이 시신을 수습하면서 그가 코로나19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것이 소문나 장례식장들이 돈벌이에 나섰기 때문이다.

강 단장은 지난 2002년부터 700여 고독사와 기초생활수급자 고인들의 마지막을 지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이처럼 장례지도사로 나서게 된 것은 암 투병 중 얻은 깨달음 때문이다. 그는 “여러 일을 하면서 갑자기 방광암 3기 진단을 받아 급히 수술을 받았다”며 “여섯 차례에 걸친 항암 치료와 60회의 방사선치료를 병행한 뒤 암을 극복했지만 3년 뒤에 또 재발했다”고 되돌아봤다. 그는 이어 “치료 기간이 5년을 넘어가던 시기에 병실에서 바라본 장례식장의 모습을 보며 만약에 살아서 병실을 나갈 수 있다면 인간다운 일을 하자고 다짐했다”면서 “어려서부터 시작한 유리 시공과 미장일, 인테리어와 건축업 등 아득바득한 일을 놓고 비로소 장례지도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이렇게 고독사로 떠난 고인들을 무료로 수습하는 일을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보수를 받고 수습한 적이 없다. 오로지 돌볼 사람이 없는 고독사 사망자와 경제 환경이 넉넉지 않은 기초수급생활자의 시신만을 수습한다. 그는 “더운 여름에 고독사한 분들을 수습하다 보면 시신이 부패해 구더기가 끓고 겨울에는 시신에서 수분이 빠져나가 미라가 돼버리는 경우도 많다”면서 “특히 고독사한 분들은 안구만 뻥 뚫린 경우도 많아 처음에는 봉사 활동 일이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고 말했다.

강 단장은 자원봉사 활동을 처음 시작할 때 대구 변두리의 임대 아파트를 찾아다니며 노인들을 대상으로 팸플릿과 명함을 돌렸다. 그래서 그는 노인분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잘 부탁한다”는 전화를 많이 받곤 했다. 그는 “3~4년 정도 전화로 만약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수습해달라고 부탁한 분이 있었다”며 “막상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는 눈물을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노인의 시신 수습은 물론 장례를 치르고 고인을 시립 납골당의 무연고 안치실에 모셨다.

그는 무연고 사망자와 관련해 “혼자서 쓸쓸히 삶을 마감하는 사람 중에는 가족분들이 있는 사람도 있다”며 “대개 사망 소식을 듣고 눈물을 쏟지만 그저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전화 한 통 하는 관계만 유지했어도 그렇게 쓸쓸히 눈을 감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상용 기자
kim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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