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검색창 닫기

서울 묵동 뒷골목, 머리 희끗한 학생들 몰려드는 곳엔 그가 있다···“봉사로 ‘인생2막’ 열래요”

■ 태청야학서 글쓰기 지도 봉사하는 소경수씨

암투병 장인, 사춘기 아들 보며 ‘가족과 시간 보내자’ 결심

우연히 본 야학 교사 모집 공고에 ‘두근’…그 길로 지원

“어르신들 함께하며 편견 걷혀…봉사하는 인생2막 살래”


오후 7시. 서울 중랑구 묵동의 좁은 골목에 있는 건물로 책가방을 멘 이들이 모여든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늦깎이 학생들이 들어선 곳은 태청야간학교의 수업현장이다.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성인들을 가르치는 태청야학은 1974년 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50년간 약 1100명이 이곳을 거쳤다.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는 마흔 명의 학생들은 이곳에서 밤을 밝히며 읽고 쓰는 기쁨을 깨친다. 기쁨이 학생들만의 것은 아니다. 야학에서 봉사하는 이들 역시 즐겁기는 마찬가지다. 지난달 23일 라이프점프와 만난 소경수(43)씨는 “야학은 마법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야학 선생님들은 교실로 들어가는 문을 ‘마법의 문’이라고 해요.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기하게도 하루의 피로가 싹 사라지거든요.”

태청야학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경수씨. 정예지 기자


‘더 늦기 전에 가족과 함께 보낼래’ 퇴직 후 찾아간 야학


지난해 7월까지도 소씨는 군인 신분이었다. 만 55세까지 정년이 보장된 직장을 스스로 박차고 나온 그는 현재 태청야학 사랑반 담임이자 글쓰기 선생님으로 활동하고 있다. 무엇이 그를 야학 선생님의 길로 이끌었을까.

“군 임무 매뉴얼에 늘 저를 맞춰야만 했습니다. 연락을 못 받으면 큰일이니까 휴대전화를 끼고 살았어요.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삶을 보내다 보니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늘 뒷전이었지요.”

그랬던 그가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가 찾아왔다. 장인어른이 췌장암을 진단받고 1년여 만에 세상을 떠난 것. 사춘기가 일찍 찾아온 아들과는 언제부턴가 소원해졌다. 가족보다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며 다시 가족 곁으로 돌아갈 기회를 만들기로 했다. 우선 부대 내 남성 최초로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지금이 아니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늦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육아휴직 석 달째였나. 차라리 직장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복직을 고민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와는 서먹하기만 했던 아들이 어느 날 제 품에 안기더라고요. 경력단절여성이었던 아내도 취업에 성공했고요.”

복직하면 소씨는 가족과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배치될 예정이었다. 주말부부를 넘어 월말부부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 겨우 끈끈해지기 시작한 가족과의 관계를 다시 깨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소씨는 퇴사를 결심했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연금이 나오니까 아껴서 살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후회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을 떠올리며 즐겁게 살아보자고 마음먹었고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소씨는 우연히 태청야학 교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접했다. 그 순간 그의 가슴이 쿵쾅거렸다고. 소씨의 부모님도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터라 비문해 중장년의 답답함도 이해가 됐다. 그는 그 길로 태청야학의 문을 두드렸다.

봄소풍을 떠난 태청야학 학생과 교사들. 소경수씨 제공


봉사하면서 어르신들 마음도 이해


태청야학은 한글 기초와 글쓰기, 맞춤법, 초·중등 검정고시 수업을 운영한다. 시대 변화에 발맞춰 스마트폰과 키오스크 이용법, 보이스피싱 예방 등 디지털 문해교육도 함께 진행한다. 그중 올해 소씨가 맡은 과목은 글쓰기다.

학생 일부는 간단한 문장을 완성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소씨는 이랬던 학생들이 본인의 삶을 글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기초 문법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문장으로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태청야학 학생이 작성한 그림일기. 소경수씨 제공


한창 학교에 다닐 법한 10세부터 돈을 벌어야만 했던 학생, 동생을 키워야 하는 맏이라서 학교에 갈 수 없었던 학생, 친구가 책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만 봐야 했던 학생 등 야학에 온 학생 가운데 사연 없는 이는 없었다.

“사실 야학 봉사 전에는 지하철에 막무가내로 밀치고 들어오시거나 고성방가로 통화하는 어르신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해할 때가 많아요. 마음의 그릇이 넓어진 거죠. 각박한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믿다 보니 타인을 배려할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거죠.”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지만 서로를 이해할 접점이 없었던 세대가 야학에서 만난 셈. 그는 이 접점만으로도 세대 편견이 걷어지고, 공감의 힘을 기를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우리 야학은 20대 선생님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학생들의 손주뻘 되는 선생님이지요. 이곳에서 청년들은 노년의 삶을 이해하고, 노년 세대는 젊은 MZ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며 서로 어우러집니다.”


누군가 돕는 일로 ‘인생 2막’ 열고파


그는 최근 지역 보육원에 기부와 후원을 시작했다. 보육원은 고기가 귀해 두 달에 한 번 ‘삼겹살 데이’가 따로 있다는 걸 신문을 통해 알게 된 후다. 그가 주관하는 달리기 모임 회비를 보육원에 전액 기부하고 회원들과 매달 아이들을 찾아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

봉사의 중독성을 깨달은 그는 인생 2막의 직업도 명예나 돈보다는 봉사, 나눔을 소명으로 여기는 업을 택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경쟁을 부추기죠. 그런데 봉사는 ‘내가 쓰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더군요. 아직 정확한 진로를 찾은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남들을 돕는 일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변을 잘 둘러보시면 할 수 있는 봉사는 많아요. 봉사는 타인뿐 아니라,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길이에요. 이 기쁨이 여러분에게도 찾아오길 바라봅니다.”
정예지 기자
yeji@rni.kr
< 저작권자 ⓒ 라이프점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메일보내기

팝업창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