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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넘어도, 새벽에 나와도···일할 곳 있어 행복해요”

■ 김밥집으로 시니어일자리 만든 서울 서대문구

남녀소노 친숙한 김밥서 사업성 예감…지역 김밥집 협업

조리사 경력 시니어 14명 채용 …조리법·식당 운영 전수

“꼭 성공해 더 많은 시니어일자리 만들고 지원에 보답”


바쁜 출근길 한 손에 들고 먹을 수 있는 식사, 봄가을 나들이에 빼놓을 수 없는 음식, 어린이집 소풍부터 수험생 도시락까지…. 일상이나 특별한 날이나, 어린이나 어른 누구에게나 친숙한 음식, 바로 김밥이다. 우리는 흔히 맛있는 음식을 가리켜 ‘어머니 손맛이 담겼다’고들 한다.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친숙한 음식, 김밥을 만드는 식당이 최근 서울 서대문구에 새로 들어섰다. 취급하는 음식은 여느 김밥집과 다를 바 없지만, 이곳에는 다른 식당과는 차별화되는 특별함이 있다는데….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지난달 26일 영미김밥 서대문시니어점을 찾았다.

영미김밥 서대문시니어점의 시니어직원 정숙애(왼쪽)씨와 김성숙씨가 김밥을 들어 보이고 있다. 서대문구 제공


‘김밥’으로 시니어 일자리를


오전 10시, 식당 안에 들어서니 작은 테이블 4개 뒤로 주방이 보였다. 탁 트인 주방에서 열심히 김밥을 말고 있는 분들은 다름 아닌 어르신들. 계산대에서 포스(POS)기기를 다루거나 행주로 쟁반을 닦으며 손님에게 나갈 음식이 만들어지길 기다리는 분들도 모두 머리 희끗한 어르신들이었다. 그렇다. 이곳은 서대문구에 사는 시니어를 위한 일자리의 하나로 만든 김밥집이었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내년이면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 어르신일자리를 만드는 일은 복지 차원에서도 중요하지만 빈곤과 같은 경제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서대문구와 구의 어르신일자리를 위탁 운영하고 있는 서대문시니어클럽은 지난해 7월 어르신을 위한 새로운 일자리 만들기에 나섰다. 시니어카페, 시니어빨래방, 시니어식물병원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일자리가 앞으로 필요할 것이란 판단에서다. 머리를 맞댄 관계자들은 분식집을 떠올렸다. 비교적 쉬우면서도 친숙한 음식을 만드는 일은 시니어에게도 부담이 적을 것으로 봤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게 바로 김밥집이었다.

“김밥은 어른, 아이 누구에게나 친숙한 음식이잖아요. 어르신들도 집에서 다들 만들어보신 음식이라 배우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요.”

서대문구 어르신복지과에서 일하는 주아름 주무관은 김밥집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대문시니어클럽의 김태경 관장은 김밥집을 운영할 수 있는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단, 원칙이 있었다. ‘아무 김밥집’이 아닌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김밥집’이란 조건을 만족하는 곳이어야 했다. “전문 프랜차이즈 업체를 찾아간다면 노하우를 전수받기 훨씬 쉬웠을 겁니다. 하지만 되도록 지역에서 성장한 식당과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지역 브랜드의 성장과 상권 활성화 측면에서도 옳은 방향이라고 봤고요.”

영미김밥 서대문시니어점의 시니어 직원들이 김밥을 만들고 있다. 서대문구 제공


서대문구는 다행히 먹거리 상권이 발달한 편. 신촌, 이대 등 대학가는 물론이고 연희동 역시 인기 있는 토박이 식당이 꽤 있었다. 김 관장은 식당마다 찾아다니며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몇몇 식당이 그의 뜻엔 공감했지만 실제 협력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프랜차이즈와 같은 노하우 전수 시스템을 아직 갖추지 못했거나 좁은 지역에서 상권이 겹칠 수 있다는 우려 등이 발목을 잡았다.

진전이 없어 막막하던 차 영미김밥을 만났다. 영미김밥은 신촌 일대에서 ‘맛있고 건강한 김밥’을 파는 곳으로 제법 유명한 곳이었다.

“영미김밥 사장님이 마침 프랜차이즈로의 확장을 고민하시던 차였더라고요. 어르신 일자리 창출이라는 뜻에도 공감하셨고요. 저희 제안에 선뜻 손을 잡아주셔서 정말 감사했지요.”

협업할 모델을 찾은 뒤,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지난해 10월에는 영미김밥 서대문시니어점을 조성하는 계획이 서울시의 동행식당 사업에 선정됐다. 지역에 거주하는 취약계층 어르신께 무료로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 식당으로 낙점된 것이다. 식비는 서울시와 서대문구가 반반씩 부담한다.

재료 손질부터 포장, 계산까지 모두 시니어 직원 몫


서대문시니어클럽은 김밥집에서 일할 어르신 선발에 들어갔다. 까다로운 선발 과정을 거쳐 조리를 맡을 어르신 열네 분과 계산, 포장을 담당할 어르신 두 분이 채용됐다. 이들은 지난해 12월부터 올 2월까지 조리법, 매장 운영 노하우 등을 전수 받았다.

언뜻 친숙해 보이는 일이라도, 그 일에 투입돼 직접 실행하려면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시니어는 더 그렇다. 교육 과정에서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서대문시니어클럽도 일 할 어르신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이 점을 크게 우려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단체급식소나 식당 등에서 조리사로 일한 경력이 있는 분들을 중심으로 선발했다.

영미김밥 서대문시니어점의 시니어직원 정숙애(왼쪽)씨와 김성숙씨. 서대문구 제공


오랜 기간 조리사로 일했던 김성숙(78)씨도 그 중 하나다. “젊었을 때부터 주방에서 일했어요. 은퇴하고 잠시 쉬다가 다른 일자리에 도전해봤는데 손에 영 익지 않더라고요. 재미도 없고. 음식 만드는 일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겐 자부심이 커요.”

정숙애(74)씨는 일흔이 넘어도 일할 곳이 있어 기쁘단다. “남들은 괜찮으냐며 걱정하는데 못 할 게 뭐 있겠어요. 저는 걱정도 안 되고 무서울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도전했어요. 재료를 손질해야 하니까 추운 새벽에 벌벌 떨며 차를 기다릴 땐 ‘이게 뭣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결론은 잘 했다고 생각해요.”

“경쟁력 갖춰 살아남아 더 많은 시니어 일자리 만들자”


아무리 좋은 취지로 식당을 열었더라도 찾는 손님이 적어 수익을 못 낸다면 그 식당은 오래가기 어렵다. 주민들의 소중한 세금이 들어가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당연하게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빠르게 자리매김해야 그 성공을 바탕으로 시니어일자리를 더 만들 수 있을 터. 이에 서대문시니어클럽은 안정적인 수익 창출을 목표로 삼았다. 지역 상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충분한 경쟁력 확보는 기본이다.

시범영업 기간임에도 식당을 찾는 고객들의 반응은 좋다. 참치 제육 등 김밥 6종을 선착순 80명에게 선보였을 땐 줄이 길게 늘어설 정도였다. 이성헌 서대문구청장도 직원과의 식사 메뉴로 김밥을 택하거나 틈 날 때면 식당을 찾는 등 영미김밥 서대문시니어점의 성공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서울 서대문구 시니어일자리 종사자들이 문화활동을 떠나기 전 이성헌(가운데) 서대문구청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대문구 제공


영미김밥 서대문시니어점은 이달 중 정식으로 개장할 예정이다. 김밥을 만드는 일이 안정화되면 다른 분식으로 메뉴를 늘리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시니어들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정씨는 “우리 김밥은 모든 재료가 풍성하게 들어가는 스타일”이라며 “특히 채소가 골고루 들어가 건강하면서도 맛있는 게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청장님, 영미김밥 사장님, 서대문시니어클럽 관장님, 우리 공무원 분들 모두가 많이 지원해주시는데 고마워서라도 꼭 성공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정예지 기자
yeji@rni.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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