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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실패를 딛고 창업가의 이야기를 담다" 미디어 크리에이터 태용

[원부연의 직업의탄생 ⑬] "실리콘밸리에서의 인터뷰가 지금의 ‘EO’를 만들었죠"


창업을 넘어 ‘창직 하는 사람(Job Creator)’들이 늘고 있다. 끊임없는 세상의 변화와 새로운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 회사에서 찾지 못한 직업 정체성에 대한 숙제를 개인들이 스스로 고민해 찾게 된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의 직업을 새롭게 정의내리기 시작했다.

‘원부연의 직업의 탄생’은 스스로 창직을 한, 나만의 단어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인과 산업 두 영역에서 새로운 화두를 제시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두 번째 커리어를 꿈꾸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인사이트를 전하고자 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고 대기업에 취직하는 건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도전하고 싶거나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자는, 열정과 패기 넘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그의 인생을 바꾸게 한 계기가 ‘스티브 잡스’였다. 창조적인 사람이 주는 영향력에 감동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창업, 스타트업, 마케팅 등 관련 분야 정보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읽고 찾아보다가 무작정 기업가들에게 만나달라고 요청해 이야기를 나눴다. 자연스레 창업의 세계에도 발을 담갔다. 대학 졸업 전 총 세 번의 창업을 했고, 결과적으로 시원하게 망했다.

보다 뛰어난 창업가들을 만나고 싶었다. 아르바이트 해 모은 돈 350만원을 가지고 무작정 실리콘밸리로 향했다. 방황했던 그를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넉넉한 마음으로 품어줬고, 그들의 이야기를 영상 콘텐츠로 담았다. ‘EO’이라는 유튜브 채널은 그렇게 시작됐다.

1인 크리에이터에서 미디어 스타트업 대표가 된 ‘이오 스튜디오’ 김태용 대표.




꿈 없던 학창시절, 잡스를 만나다


- 원래 꿈이 뭐였나.

"크게 꿈도, 공부에 관심도 없었다. 그래도 추상적인 꿈들은 있었다. 막연히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미술에 관심이 있어 미술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순수 미술로 가려 했는데 돈을 벌 수 있을지 나도 부모님도 걱정이 됐다. 미대를 가더라도 벌이가 가능한 디자인 전공을 하기로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입시 디자인 공부를 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없더라. 고3 때 그만두고 수능을 봤다.”

- 대학 전공은 어떻게 정했나.

“회계학을 전공했다. 아버지가 세무 공무원이셨는데 이쪽 분야도 영업이나 비즈니스가 중요하다고 하더라. 아버지가 어느 정도 노하우를 쌓아왔으니 이 쪽 일을 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선택한 전공이다.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열심히 하려던 찰나 1학년 1학기 시험 직전 맹장염에 걸려 시험을 못 보게 되었다.”

- 이후 전공 공부를 포기했다고.

“사실 공부도 재미없는데다 아픈 시기를 거치니 의욕까지 없어졌다. 아마 하기 싫은 차에 나름 핑계를 붙였던 것 같다. 그렇게 전공과목과는 담 쌓고 살았다.”

- 창업 생각은 없었나.

“내가 09학번인데 1~2학년 때까지만 해도 청년 창업 이슈가 없을 때였다. 2학년 1학기 까지 대학 생활을 즐기다 군대를 갔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내 생각을 표현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즐겼던 것 같다. 막연하게 내 브랜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 군대에서 ‘스티브 잡스’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군대 갔던 2011년에는 ‘스티브 잡스’에 대해 잘 몰랐다. 당시 애플을 쓰는 사람들은 특수한 직군에 있거나 부자 친구들 이라는 생각이었고. 그런데 군대 동기 중 한 명이 잡스 마니아였다. 잡스를 찬양하던 그 친구의 영향을 받았던 거 같다. 군 생활 중 ‘스티브 잡스’가 사망 했는데 그날 그 친구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픈 날이라는 표현을 하더라.”

- 어떤 지점에 빠져들었나.

“월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 잡스’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을 총 세 번 정도 읽었는데 내용의 꽤 많은 부분이 잡스 비판 이었다. 언론에서 위대한 기업가이자 예술가로 추앙하는 분위기와는 다른 관점이었다. 주변인물들과의 잡스 일화도 안 좋은 내용들이 많았고. 하지만 책을 다 보고 난 후에 느껴지는 지점들이 참 많았다. 한편으로는 위로를 얻기도 했다.”

- 위로가 된 이유는.

“잡스는 마약을 한 경험도 있고, 직원들에게 때로는 못되게 굴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들을 긴 호흡으로 바라봐 주는 시선이 좋았다. 나는 스티브 잡스가 한 인간으로서는 자유롭게 살다 간 느낌이 들더라. 남의 눈치 보고 살 필요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위로가 되었다.”

- 무언가 구체적인 꿈이 생겼는지.

“이후 창업에 대한 꿈이 생겼다. 창조적인 활동을 해보고 싶었고 인간으로서 영향력을 표출하고 싶었다. 기업을 통해 예술가라는 칭호까지 얻은 잡스를 보며 나도 뭔가 발자취를 남기고 싶어졌다. 말년 휴가 때 부터 어떻게 하면 기업가가 될 수 있을지 고민을 시작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준 월터 아이작은의 책 ‘스티브 잡스’. /사진제공=민음사




제대 후 세 번의 창업 실패


- 복학 후 기업가들을 만나고 다녔다.

“2012년에 제대를 했는데 복학까지 시간이 좀 남았다. 그래서 언론에 소개된 기업가들에게 무작정 만나달라고 연락을 했다. 당연히 안 만나줬고 그래서 다른 미끼들을 던졌다. 나는 경영 컨설턴트인데 당신 회사 마케팅 방향이 우려스럽다는 식이었다. 그랬더니 중소기업 사장님들 중에서는 꽤 많은 분이 약속에 응해주셨다. 그런데 갓 제대한 학생이 나오니 황당하셨을 것이다.”

- 기업가들을 만나달라고 요청한 이유는.

“그냥 기업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기업가 정신을 알고 싶었고. 나 역시 마케팅이나 인사이트에 대한 부분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오히려 작은 프로젝트들을 맡겨 주시기도 했다. 기업가들을 만나다 보니 진짜 일을 하는 사람과 아닌 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보는 눈이 생겼다.”

- 첫 창업을 했다. 어떤 아이템인가.

“예술 작품을 판매하는 플랫폼이 시작이었다. 선배 두 명이 하던 예술가들을 위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였고 앱도 출시된 상태였다.”

- 어떤 방식으로 참여했는지.

“어느 정도 사업 방향이 정해진 상태에서 함께했다. ‘좋아요’를 많이 얻은 예술가의 작품을 굿즈로 만들고 판매 수익을 작가와 나누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매출이 높진 않았다. 그 모델을 접은 후 디자인회사로 방향을 바꿨고 제조와 유통을 가진 자체 브랜드 ‘위글위글’을 만들었다. 투자유치, 피칭 등 할 수 있는 역할들에 참여했고 이제는 소액 주주로 남아있다.”

-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나는 아티스트들을 위한 걸 하고 싶었는데 디자인 브랜드 회사가 되다보니 조금 재미를 잃었다. 회사의 성장 방향에는 맞지만 내 마음이 끌리지는 않았다.”

- 두 번째로 가구 사업을 시작했다.

“깜냥도 없이 덤볐다가 단기간에 망한 케이스다. 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이유가 컸다. 제품 만든 경험 하나 믿고 덤볐는데 가구는 전혀 다른 영역이더라. 반 이상이 창고업인 물류가 중요한 시장이었고 제품 자체도 예민한 분야였다. 가구 잘 만든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 어떤 물건들을 만들어 팔았나.

“소파와 층간소음 방지 매트가 메인이었다. 초도물량 500개로 시작했다. 소비자 사전 평가 때도 반응이 좋았지만 실전은 달랐다. 출시하자마자 급속도로 상황이 악화되어갔다. 준비부터 망하기까지 1년 정도가 걸렸다.”

- 창업 멤버는 어떻게 됐는지.

“총 3명이서 창업을 했다. 나와 건축 디자이너 두 명과 함께 했다. 정부 지원금 약 5천6백만원 에 가구 소재를 만드는 제조 회사에서 1억 정도 투자를 받았다.”

- 가구 관련 회사가 투자자였으면 다른 기회도 있었을텐데.

“회사가 매출이 나오지 않자 자회사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는 젊은 나이에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빚이 많이 쌓이기 전에 빨리 정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재고 처리하느라 정말 고생 많이 했다.”

- 세 번째 창업 아이템은.

“마지막으로 졸업할 때까지 프로젝트로 어플을 만들었다. 프로젝트 하면서도 가구재고 땡처리 하느라 바빴다. 돈이 없으니 창고 계약은 할 수 없어 학교 곳곳에 가구들을 숨겨놓으며 조금씩 팔았다. 물론 마지막으로 했던 프로젝트도 잘 된 건 아니다.”

- 창업이라는 시장에 너무 빨리 뛰어든 건 아닌가.

“그러기도 했다. 나 때까지만 해도 창업이 활성화되기 전이었다. 창업이 자연스러워진 건 15학번 쯤 부터였고. 어딜 가도 나이가 제일 어렸다.”

- 창업해서 좋았던 순간은 뭐였을까.

“내가 좋아하고 공감하는 것에 원하는 만큼 집중할 수 있다는 것. 이를 누군가 공감해 제품을 사주는 과정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것. 이런 것들이 사업의 중독적인 면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매일 같이 증명 해내야 하는, 단조롭지 않는 부분이 이 일을 계속 하게 한다.”

- 졸업 후 계획은 어떻게 세웠나.

“내 활동들을 재미있게 지켜봐준 분들이 많았다. 학점도 2점대고 이렇다 할 스펙도 없었는데 좋은 스타트업이나 테크 회사들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덕분에 취업 걱정은 없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이 있었다고.

"졸업 시점이 28살 이었다. 이제는 막연하게, 해보고 싶어 창업 할 수는 없었다. 삶에 대한 무게감이 굉장히 커졌다. 누군가의 회사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더 뛰어난 사람들을 만나 영감을 얻고 싶었다. 회사를 다니는 것보다는 좀 더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

배낭 하나 메고 김씨는 실리콘밸리로 향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기로 한다.




실리콘밸리로 떠나다


- 콘텐츠 제작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대학생들 쓰는 쿠폰 적립 앱을 만들었는데 오히려 게시판이 활성화 돼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그런데 커뮤니티를 운영하다 보니 타깃들이 볼 콘텐츠가 필요했고, 이를 수급할 방법들을 고민하다 뉴미디어 회사들을 통해 콘텐츠를 공급 받았다. 받는 거로는 한계가 있어 직접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이 때 콘텐츠 제작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 기업 일도 받게 되었다.

“당시 ‘패스트 캠퍼스’에서 마케팅 팀으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입사는 부담스러운 상태였고 일단 영상 프로젝트를 맡기로 했다. SNS에 올릴 4차 산업 혁명에 대한 트렌드를 알려주는 4편짜리 영상이었다. 작업 후 350만원 정도 비용을 받았고, 그 돈으로 실리콘밸리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왜 하필 실리콘밸리였나.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을 찾아가보자는 결심 때문이었다. 4차 산업 혁명의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 무작정 떠난 미국행인가.

“당시 형이 미국 동부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형을 보러 간다고 하길래 비행기표만 내 달라고 부탁 드렸다. 일단 동부로 가서 형이랑 일주일 정도 보낸 후 편도 비행기표를 끊어 서부로 향했다. 실리콘밸리로 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었을 뿐 계획은 전혀 없었다. 한인 커뮤니티 등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며 일단 되는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심정이었다.”

- 첫 인터뷰이는 누구였는지.

“실리콘밸리의 핀테크 회사에서 UX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김영교님이 첫 인터뷰이였다. 당시 싼 숙소를 찾다 샌프란시스코 외곽인 웨스트 오클랜드라는 지역을 택했는데 정말 무서운 동네였다. 멀쩡한 지하철도 그 동네로 갈수록 이상한 분위기가 연출되곤 했다. 촬영 장비가 있던 터라 매일이 두려웠다. 그 이야기를 듣고 김영교 디자이너가 지인의 집을 소개해줬다.”

- 그 곳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영화 공부를 하는 분이었는데 영상, 특히 카메라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그동안에는 편집만 어느 정도 감각적으로 하는 수준이었는데 촬영에 대해서도 많은 팁을 얻게 되었다.”

- 이후 인터뷰이들은 어떻게 찾았나.

“한인들이 모이는 모임에 무작정 나갔다. 몇 명까지는 어찌어찌 지인들을 통해 인터뷰가 풀렸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한국 언론사들에게 샘플 영상을 보내 제휴 요청을 드렸다. 여기저기서 콘텐츠를 올려준다는 약속을 받은 후 언론에 소개되는 인터뷰라고 섭외를 하니 한결 수월해졌다. 그렇게 ‘리얼밸리’라는 타이틀로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 ‘EO’만의 인터뷰 스타일이 있다. 어떻게 만든 건가.

“그 당시 ‘셀레브’가 굉장히 유행했을 때다. ‘셀레브’ 측에서 콜라보 제안도 왔었고. 초반에는 ‘셀레브’의 영상 흐름을 염두하며 작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름의 차별화 지점을 고민했다. ‘셀레브’가 3분 전후의 짧은 영상이라면 나는 좀 더 긴 호흡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 외 차별화 지점이 있다면.

“일단 직접적인 동기 부여가 아닌, 조금 더 깊이 있는 지식 콘텐츠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짧은 영상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청중 타깃도 처음부터 명확했다. 스타트업의 업계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스타트업의 기술적인 내용들을 초반에는 따로 설명하는 코너를 운영하기도 했다.”

- 어려운 지점도 많았다고.

“미디어 문법이나 트렌드가 너무나 빨리 바뀐다. 3분 정도 분량의 숏폼(Short-Form)과 10분 분량의 영상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고. 페이스북과 유튜브 문법이 또 다르다. 빠른 변화에 영상 콘텐츠를 잘 맞추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더라.”

- 힐링과 넉넉함을 받았다고 들었다.

“나 역시 뭐 하며 살지 고민하던 28살 청년이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 다른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그들은 실패에 관대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늘 존중했다. 일단 시작해보라는 응원을 던졌다. 덕분에 힐링, 넉넉함, 긍정의 에너지를 얻었다.”

- 이를 사업화 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

“처음부터 사업화 할 생각은 없었다. ‘셀레브’와의 콜라보가 무산된 후 자연스레 내 브랜드의 콘텐츠로 업로드를 시작해나갔다. 그런데 채널 오픈 후 3개월 정도는 돈이 안 돼서 정말 힘들었다. 미국에서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카드 값이 쌓여 경제적으로 고생도 좀 했다.”

실리콘밸리에서의 첫 인터뷰이. UX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김영교님.




1인 크리에이터 ‘EO’ 채널을 만들다


- 심플한 로고다. 본인이 디자인했나.

“처음에는 개인 프로필 사진을 넣고 배경에는 실리콘 밸리 사진을 넣는 단순한 구조였다. 채널 오픈 3시간 전 쯤 영교님으로부터 조금 더 재미있게 해보라며 연락이 와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나눴다. PPT로 후다닥 보완해 만든 게 ‘ㅌㅇ’이라는 디자인이다. 처음엔 내 이름의 자음을 따서 지었지만 나중에는 영어로 바꿔 현 이름인 ‘이오 스튜디오’가 됐다.”

- ‘이오 스튜디오’는 어떤 의미인가.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과 기회(Opportunity)를 상징하는 뜻을 담은 알파벳 기호다. 여기에 스튜디오를 붙였다. 스튜디오를 붙이면 왠지 성공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스튜디오 룰루랄라’, ‘스튜디오 드래곤’처럼. (웃음)”

- 콘텐츠 라인업은 어떻게 정했는지.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17명의 인터뷰를 담아 ‘리얼밸리 시즌1’을 소개했다. 스타트업 창업자나 개발자부터 실리콘밸리에서 음식점을 창업한 사람들까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이야기였다. 유튜브를 통해 콘텐츠를 하나씩 업로드했다.”

- 언제부터 수입이 생겼나.

“‘리얼밸리’와 같은 콘텐츠를 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그간 쉽지 않았다고 한다. 영상 콘텐츠의 경우 나름 진입장벽이 있던 터였다. 내가 만든 콘텐츠가 화제가 되자 여러 회사나 기관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 대체로 어떤 업무를 제안했는지.

“첫 번째로 성사된 곳이 디캠프(은행권 청년 창업 재단)라는 회사였다. 제작비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디캠프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때 프로덕션을 써보는 등 다양한 방식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이후 정부 쪽에서도 관심을 보였고 강연 요청도 많이 들어왔다. 덕분에 ‘리얼밸리 시즌1’ 런칭 8개월 후 부터는 수익이 생겼다. 그 때까지도 1인 크리에이터로 활동했다.”

- 팀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는.

“‘리얼밸리 시즌2’ 때 캐나다에서 워킹 홀리데이 하던 친구가 카메라 들고 같이 찍겠다며 무작정 미국으로 찾아왔다. 그 친구가 지금의 공동 창업자가 되었다. 현재는 총 9명이 함께 하고 있다. 대체로 영상 팀이며 스토리텔링은 지금도 거의 내가 담당한다.”

- ‘EO’ 콘텐츠의 차별점은 무엇일까.

“역시 스토리텔링 역량과 제작 퀄리티를 높게 사주는 것 같다. 덕분에 일이 꾸준히 들어온다. 스타트업의 이야기를 다루는 콘텐츠다 보니 쉽게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고. 물론 전체 시장으로 봤을 때 작은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 최근에서야 법인 전환을 했다

“콘텐츠를 꾸준히 올린 3년간 기업화 하고 싶은 생각이 크지 않았다. 이제 법인 전환한지 1주일 됐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된 다음에, 또 시드 머니를 적당히 만든 후 시작하고 싶었다. 일단 먹고 살 정도까지는 왔는데, 확장에 대한 고민은 해결하지 못했다.”

- 최근 20분짜리 영상을 만들기 시작한 이유는.

“그간 10분 분량의 영상을 올려왔다. 그런데 모바일 영상이란 게 굉장히 트렌디 하다. 머지않아 상향 평준화가 될 것이라 생각했고 퀄리티를 미리 높여 두는 게 경쟁력이 될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분량도 20분으로 늘리고 촬영 퀄리티도 높이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있다.”

- 미국 스타트업과 한국 스타트업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느낀점은?.

“전혀 다른 생태계라 1대1 비교는 힘들 것 같다. 실리콘밸리는 이민자가 많고, 돈도 많이 주지만 동시에 해고도 쉬운 곳이다. 한국은 우리끼리 문화가 아직 있다. 고용도 경직되어 있는 편이고. 그래도 그런 환경 속에서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타트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는 명확한 타깃이 있었기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타트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는 명확한 타깃이 있었기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김태용’ 의 비전과 미래


- 어떤 직업으로 불리길 원하나.

“사실 누군가 부르는 대로 직업이 되곤 했다. 지금은 미디어 스타트업 대표가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크리에이터이자 미디어 스타트업 대표인 태용, 이 정도로 하면 될 것 같다.”

- 비즈니스 모델은 무엇인가.

“잘 되다가 갑자기 안 된 미디어 회사들이 많다. 그런 상황을 보며 미디어가 굉장히 어렵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트래픽이 늘면 뭘 붙이면 더 잘될 것 같은데,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혁신이 쉬울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분야가 미디어다. 결국 특정 플랫폼에 의존하는 콘텐츠는 장기적으로 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스토리텔링을 잘 하고 집중하는 게 우리의 지향점이다.”

- 올해의 목표는.

“‘넷플릭스’에 소개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콘텐츠를 잘 만드는 게 목표다. 내부적으로는 최대한 보수적으로 경영하면서 스토리텔링 수준을 높이는 게 목표고. 대표로서 뛰어난 인재들이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 그러다보면 비즈니스가 따라 붙을 거라 생각한다.”

- 1년 사이 10만 구독자가 늘었다.

“작년엔 8만 정도였는데 1년 새 한 달에 만 명 꼴로 늘었다. 정말 서서히 꾸준하게 올라가는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한 번에 쑥쑥 성장했으면 하는데 마음처럼 되진 않는다.”

- 실리콘밸리 이야기를 다룬 ‘리얼밸리 시즌3’도 준비 중인지.

“아직 계획은 없다. 당장은 2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에 집중하고 있다. 더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공격적인 방향을 고민 중이다. 나중엔 이를 ‘리얼밸리’에 적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스타트업 대표들이 ‘EO’채널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뭘까.

“스타트업 쪽은 인재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생태계 안에서는 투자를 좀 받았다고 해도 대중적인 인지도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결국 이 안에서만 유명할 뿐인데 그걸로는 좋은 인재를 찾기가 힘들다. 그래서 브랜드와 대표를 알리고, 회사 철학을 전하는 게 중요해졌다. 그 필요성이 우리 콘텐츠와 잘 맞았던 것 같다. 명확한 청중이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

-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콘텐츠가 있다면.

“많은 성취를 한 기업가일수록 원론적인 걸 중시하며 무게감이 남다른 건 있다. 그런 지점들을 나 스스로 많이 배우는 것 같다. 토스 편과 김봉진 대표 편이 기억에 남는다.”

-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나 역시 스타트업 생태계 안에만 있다 보니 내 존재감을 괜히 크게 느끼는 부분이 있다. 그 점에 대해 매일 경계하고 또 조심하려고 한다.”

보수적으로 회사를 경영하며 그들만의 모델을 만드는 게 올해의 목표다.

이오 스튜디오’의 로고. 누구나 기업가정신을 갖고 자신만의 기회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콘텐츠를 지향한다.


원부연. 서울경제신문 라이프점프 객원기자. 전 광고 기획자에서 음주문화공간 기획자로 창직 후 술집, 극장, 살롱 등 서로 다른 9개의 공간을 런칭했다. <합니다, 독립술집>, <회사 다닐 때보다 괜찮습니다.>, <퇴사 말고, 사이드잡> 세 권의 책을 쓴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원부연 객원기자
서민우 기자
ingagh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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