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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지나간 자리, 인생이 꽃피다

■엘리자베스 페이튼 국내 첫 개인전

작은 화폭에 감각적 붓질·선으로

영화 '해피투게더' 양조위 얼굴 등

셀럽들 초상화 '불명확'하게 그려

신작 8점 포함 국내서 11점 소개

엘리자베스 페이튼이 영화 ‘해피투게더’의 주인공 양조위의 얼굴을 그린 'Tony Leung Chiu-Wai(Happy Together)/사진=Tom Powel Imaging


물 머금은 듯한 보랏빛 분홍빛 선이 곳곳에 꽃 같은 길을 냈다. 색깔도, 방향도, 굵기도 다르게 붓이 지나간 자리에는 꽃보다 아름다운 누군가의 얼굴이 피어난다. 얼굴 속에는 저마다의 역사와 이야기가 담겼다. 오랜 시간의 축적처럼 수많은 붓질로 완성한 얼굴. 물감의 흐름마저 그대로 간직한 불명확한 형상은 그래서 생생하고, 또 궁금함을 자아낸다.

미국의 초상화가 엘리자베스 페이튼은 A4 용지만한 작은 화폭에 빠르고 선명한 붓질로 유명인의 얼굴을 그려왔다. 세밀한 묘사보다는 전체적인 느낌과 선, 붓 자국을 살린 ‘아마추어적인 재해석’이 페이튼 작품의 핵심이다. “회화는 한순간 순간의 축적이며, 그 자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건져내는 작업이다. 다시 보고 그리는 것인데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고 싶은 대로 표현한다.” 개성 있는 화법으로 주목 받아온 페이튼의 국내 첫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리안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페이튼이 전속 작가로 있는 영국 런던의 사디콜(Sadie Coles HQ)과 3년 전부터 접촉해 성사된 전시다.

페이튼은 주변 지인과 유명 인사, 역사적 인물을 그려왔다. 나폴레옹, 엘리자베스 1세부터 존 레논, 앤디 워홀,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 등 이름만 들어도 친숙한 인물들이 작품의 소재가 됐다. 그런데 그림을 마주해도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화폭 속 얼굴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리기 힘들다. 페이튼의 작업이 전체적인 느낌에 집중하며 얼굴에 담긴 이야기와 감정, 인간성을 표현하는 데 방점을 찍은 탓이다. 작가는 대중 매체에 실린 사진을 참고해 그림을 그리는데, 세밀한 묘사로 사진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불명확하게, 일부러 아마추어 같은 방식으로 얼굴을 재해석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페인팅과 드로잉, 모노타입 등 총 11점의 작품을 선보이는데, 이 중 8점이 신작이다. 작품들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가로 27cm, 세로 35cm 화폭에 담긴 누군가의 옆모습이다. 긴 속눈썹을 내려뜨린, 지그시 눈 감은 얼굴은 아름답지만 왠지 모르게 쓸쓸한 그늘이 느껴진다. 작품명은 ‘토니 량차오웨이(Happy Together).’ 두 남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1997)의 주인공 양조위다. 페이튼은 이뤄질 수 없는 관계와 그 고통스러운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한 이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그렸다. 유화임에도 수채화의 느낌을 살려낸 얇고 부드러운 붓 터치가 인상적이다.

엘리자베스 페이튼의 자화상인 ‘Elizabeth’(왼쪽)와 어시스턴트의 초상인 ‘Lara(Lara Sturgis March)’/사진=Tom Powel Imaging


이 밖에도 작가 본인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 ‘엘리자베스(Elizabeth)’와 자신의 스튜디오 어시스턴트를 그린 ‘라라(Lara Sturgis March)’ 등의 초상화부터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 화파를 대표하는 티치아노 작품 ‘전원 음악회’를 바탕으로 그린 ‘더 프렌즈’ 등의 신작을 만나볼 수 있다.

페이튼의 작품은 대부분 성인 손바닥으로 가려질 만큼 자그마한 것이 특징이다. 홍세림 리안갤러리 큐레이터는 “특유의 작은 크기와 화려한 색상은 관람객과 작품 속 인물의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최대한 좁혀준다”고 설명했다. 응축되고 켜켜이 쌓인 누군가의 시간이기에 이 작은 그림에는 보는 이의 발길과 시선을 오랫동안 묶어두는 강렬함이 있다. 전시는 7월 31일까지.

/송주희 기자 ssong@
송주희 기자
ss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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