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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어···그때마다 정신력으로 이겨내야”

■ 백옥현 6.25참전유공자회 인천부평지구회 지회장

지난 6월 보훈의달 맞아 ‘김주현바이각’ 맞춤정장 제작 참여

20살에 참전해 4년 10개월 간 복무

전쟁 끝 맺지 못한 게 삶의 아쉬움으로 남아

백옥현 6.25참전용사(왼쪽)사진=김주현바이각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산다”

72년 전 20살의 나이로 6.25전쟁에 참전한 백옥현(92) 씨가 한 말이다. 백 씨는 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에서 출발해 꼬박 13일을 걸어 거제도에 도착했다. 피난을 위해 나선 길이었지만, 거제도에서도 숨을 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었던 그는 군대에 자원입대해 6.25참전용사가 된다.

4년 10개월. 백 씨가 군에서 생활한 5년도 채 안 되는 이 기간은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놨다. 그는 “누구나 살면서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라며, “삶의 어느 순간 벌어지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선 정신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백 씨는 “나 역시 6.25전쟁을 겪어내고 이후 4.19혁명과 같은 다양한 사건을 관통하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큰 트라우마 없이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정신력 덕분”이라고 했다.

정신력으로 모든 것을 다 이겨냈다고 말하는 그에게 아흔해 넘게 살아오면서 아쉬움이 남는 게 있는지 묻자, “자신의 세대에서 전쟁을 마무리 짓지 못한 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대답을 통해 그가 뼛속까지 참전용사임을 알 수 있었다.

백 씨는 92세인 지금도 후손들에게 6.25전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초중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하며, 6.25참전유공자회 인천부평구지회 지회장을 맡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만나서 반갑다. 오랜만에 옷을 맞추기 위해 나들이를 했는데 어떤가.

“인천보훈지청의 추천으로 김주현바이각에서 맞춤정장을 제작하게 됐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좋은 일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 맞춤정장은 평상복과 다른 느낌일 것 같은데 어떤가.

“마치 제복을 새롭게 맞추는 느낌이다.”

- 90세가 넘으셨는데, 매우 건강해 보인다. 건강은 어떤가.

“90세가 넘어가니 매년 조금씩 다르다. 과거에는 운동을 많이 했다. 수영, 테니스, 골프 등 하지 않는 운동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은 무릎이 좋지 않아 운동을 못 한다. 그래서 골프채를 지팡이로 만들어 쓴다(웃음). 단단하면서도 지팡이 같지 않아서 좋다.”

- 인생의 큰 사건이었던 그날로부터 70여 년이 흘렀다. 그래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를 것 같은데 어떤가.

“72년 전의 일이다. 72년은 한 사람의 인생으로 보면 길지만, 또 짧다면 짧을 수 있다. 그 일을 어떻게 잊고 살 수 있겠나. 내가 잊을 수 없는 이유는 직접 그 일을 겪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후손들에게 꼭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역사 중에서는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6?25전쟁이다.”

- 후손들이 6.25전쟁을 제대로 알게 하기 위해 하는 게 있다고.

“맞다. 우크라이나전쟁을 보면서 전쟁이 어떤 것인지 간접적으로나 체험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전쟁은 끝난 게 아니다. 쉬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후손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6.25전쟁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6.25 바로 알리기’ 교육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 그럼 직접 교육도 하는 건가.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졌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주춤한 상태다. 교육을 나가면 집중해 수업을 잘 듣는 아이들이 많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흐뭇하다.”

- 전쟁에 참전할 당시 나이가 스무 살이었다. 당시 스무 살은 어른이었을테지만, 어른이어도 전쟁이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전쟁에 대한 무서움보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그래서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인천에서 꼬박 13일을 걸어 거제도에 도착했다. 피난하러 간 거였지만, 거제도에서도 이 몸 하나 숨을 곳이 없더라. 다시 인천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해 그 길로 군대에 들어갔다. 군대에 들어가 4개월간 소식도 모르고 걱정하던 가족들에게 살아있다고 편지를 썼다.”

백옥현 6.25참전용사/사진=김주현바이각


- 전쟁이 끝난 후의 삶이 궁금하다. 보통 큰 전쟁을 치르고 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있던데, 괜찮았나.

“아주 힘들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군대에서 배운 인명 구조법, 응급처치, 산업안전법 등을 대한적십자사에서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이 일을 하면서 정신력으로 힘든 상황을 이겨내려 애썼다.”

- 정신력이라고 하면 막연한 느낌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려움을 이겨냈는지 물어봐도 되나.

“삶에서 지금보다 더 큰 어려움을 있다고 생각하면 이겨낼 수 있더라. 전쟁 등 다양한 난을 겪어서 그런지 그럼 당장의 어려움이 어려움으로 여겨지지 않더라.”

- 대한적십자사에서 근무했다고 했는데, 그곳에서 은퇴할 때까지 근무한 건가.

“아니다. 15년 정도 근무하다 대한석유공사에서 15년가량 일했다. 그러다 보니 은퇴할 시기가 되더라.”

- 잠시 삶을 되돌아 봤을 때, 아쉬움이 남는게 있다면.

“대한적십자사에서 일하기 전 경기매일신문에서 기자로 일했다. 내가 취재해 쓴 기사가 지면에 실렸을 때의 느낌은 맛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정말 짜릿하고 보람됐다. 그때 사고 현장을 쫓아다니며 특종도 쓰고 참 열심히 일했는데, 자연스럽게 대한적십자사로 넘어가 터를 잡게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자를 계속하지 않은 게 아쉽다.”

- 현재 인천부평지구회 지회장을 맡고 있는데, 어떻게 하게 됐나.

“인편부평지구회의 인연은 12년 정도 됐다. 은퇴 후 봉사활동을 시작한 게 계기였다. 그러다 2015년부터 지회장을 맡고 있다. 나이가 있어 그만하고 싶어도 내가 막내라 후임이 없다.”

- 92세인데, 6.25참전유공자회에서 막내인건가.

“맞다. 이젠 6.25참전유공자의 평균 나이가 90세가 넘는다. 다들 어느새 나이를 그렇게 먹었다.”

- 후손들이 참전용사를 어떻게 기억해주면 좋겠나.

“우리 역사 속에 6.25전쟁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리도 기억하지 않겠나.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가 전쟁을 종결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전쟁의 씨앗을 후손에 남겨 두고는 도저히 눈을 감기 힘들다. 참전용사라면 다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한다.”

- 혹시 꿈이 있나.

“강화도에 땅이있다. 꿈이 있다면 그곳에 가서 힘이 닿는 만큼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다.”

정혜선 기자
doer0125@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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