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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인맥보다 중요한 건 친밀한 관계

[라이프점프] 고선주의 '50이후 새로 쓰는 관계 이야기'



사람은 누구라도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태어나서 타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부모와의 관계를 시작으로 형제자매 관계, 친구 관계로 확장되다 성인이 되어 직업을 갖게 되면 그야말로 관계망의 폭발이 일어난다. 그러다 어느 시기를 지나게 되면 이러한 관계의 확장이 느려지고 오히려 관계가 축소되기 시작한다.

직장에서의 동료관계가 가장 먼저 줄어들더니 서서히 친구관계도 사라지고,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해온 형제자매나 배우자와의 관계조차 변화가 생겨 종래에는 다시 혼자가 되어 처음처럼 사라진다. 즉, 일정시기까지의 관계 확장기 이후에는 반드시 관계 축소기가 뒤따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관계 축소는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는 시점부터 급격하게 나타나기에 이 시기를 [양적 관계]에서 [질적 관계]로의 전환기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관계의 양이 줄어들수록 역설적으로 관계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관계망이 축소될수록 관계의 진정성이 더 드러나면서 이들과의 상호작용은 오히려 삶의 질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관계의 정점을 향해가고 있거나 정점을 넘어선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금부터의 변화를 예측해보고 대비하는 일이 필요하다. 준비되지 않은 전환을 맞이하면서 ’나도 이럴 줄 미처 몰랐다‘며 당황해하고 지금까지의 자기 존재에 대한 우울감에 빠지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좌절에는 몇 가지 원인이 존재한다.

첫 번째,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인맥을 (친밀한)관계로 오해하는 경우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지위가 올라갈 때는, 그에 비례하여 관계망이 확장되기 마련이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이 몇 천 명, 몇 만 명임을 자랑하는 스타일이라면 이후 크게 실망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사람이 아닌 지위와 소속으로 저장된 이들의 공통 특성은 그 지위와 소속이 바뀌면 더 이상 필요 없는 명부라는 점이다. 소속과 지위를 함께 저장해야 누군지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 역시 상대에게 같은 존재일 뿐이다. 사람이 아닌 그 지위가 하는 일이기에 담당자가 홍길동이든 고길동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런 관계 상실은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단지 내가 입고 있던 옷을 후임자에게 벗어놓고 나온 것일 뿐이다. 내 능력을 자랑하는 넓은 인맥과 내게 중요한 친밀한 관계는 실제로 아무 상관이 없다.

둘째, 지금까지의 관계 확장에 익숙해져 관계가 상실되는 것에 불안을 느끼는 경우이다. 지금껏 관계 확장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고, 유사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인맥은 내 능력의 척도였다. 그러나 친밀한 관계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고 내가 애써서 가꿔야 하는 것이다. 꽃을 보기 위해 물을 주고 바람을 쐬어주는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처럼 내 관계를 키우기 위해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고 일정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만나는 순간 명함을 주고받음으로써 생기는 인맥이 아니라, 시간과 애정을 공들어야 하는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위해서는 기꺼이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여백이 필수적이다. 그러니 불필요한 관계들이 상실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친밀한 관계가 아닌 이상 서로에게 불필요한 인맥은 정리되는 게 더 좋은 일이다. 인맥이 줄어든다고 해서 자신의 영향력이 사라지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모든 이에게 주어진 시간은 동일하다. 이제 양적 팽창에 투자할 시기가 지나 질적 성장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한 것뿐이다. 적절한 관리란 불필요한 인맥을 정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새집으로의 이사를 위한 첫 계획이 ’버리기‘인 것처럼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질적 성장에 집중하기 위해 어느 정도 불필요한 인맥들을 정리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필요에 의해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므로 쓸데없는 고민으로 근심할 필요가 없다.

셋째, 아마도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지금껏 내가 선택하던 관계에서 이제 선택을 당하는 입장으로 바뀐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내가 관계망을 넓혀가는 것이라고 당연히 여겼는데, 어느 순간 관계 주도성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많은 경우 은퇴한 남성이 그렇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아온 나보다 지역과 친족 내에서 탄탄한 관계자원을 확보하고 있는 배우자가 더 우월한 지위에 있음을 어느 순간 깨닫는 것이다. ‘삼식이’류의 농담으로 시작되지만 농담이 현실이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젊은 세대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조직 내에서 위계를 가지고 젊은이를 대하던 시절엔 요즘 젊은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불만이었는데 어느 순간 젊은 세대로부터 선택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너무 고리타분하고 권위적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선택권이 내게 없다는 것은 내가 선택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유발한다. 그렇다면 선택받는 사람의 조건을 무엇일까?

만약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을 앞두고 있거나 인생의 목표를 바꿔보거나 삶의 변화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부터 나의 경험과 전문성에 기반 한 관계 맺기를 버려야 할 것이다. 경험과 전문성에 근거한 관계는 대부분 인맥으로 분류되는 것들이다. 내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어떤 분야의 전문가였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삶을 나누고픈 관계란 과거의 경험에서부터 만들어지지 않는다. 친밀한 관계는 진정성과 공감에 기반을 두고 상호 동등하게 맺어지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내 경험과 전문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가 필요한 정보를 구하거나 의사결정을 위한 조언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상대의 전문성이나 경험이 뭐 그리 관심이겠는가? 오히려 자신의 경험을 앞세워 우월감을 표현하는데 사용될 뿐이다. 그보다는 그 사람의 진정성을 궁금해 하고 내 언어와 내 상황, 무엇보다 내 감정에 깊이 공감해주는 파트너를 갈구한다. 친밀한 관계란 바로 이 진정성과 공감 위에서만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자.

내가 혼주인 결혼식장에 하객들의 직업구성이 어떻고 몇 명이나 찾아와 주고 축의금이 얼마이고 이런 것들은 친밀한 관계가 아니다. 부모님 장례식장에 찾아와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조문객이 별로 없는 한적한 빈소의 모습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그간 인맥관리의 상징일수는 있지만 삶 자체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미미한 것이다. 상주가 위로받는 것은 조문객의 규모가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공감해주고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몇 명의 친밀한 사람들일 뿐이다.

직장생활하면서 네트워킹 능력을 인정받는 인재일수록 그 인맥의 허무함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적절한 관계의 여백을 확보하는 일이 우선이다. 그리고 여백이 만들어진 이후 남은 관계를 소중하게 키우는 일이다. 내 진정성과 공감이라는 물을 줘서 말이다.

/고선주 서울시50플러스재단 생애전환지원본부장
서민우 기자
ingagh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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